기원전 701년 경에 앗시리아(앗수르) 왕 산헤립(Sennacherib)은 예루살렘 공격을 감행한다. 산헤립의 군사령관은 예루살렘 주민들을 위협하며, 항복하지 않으면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할 것”(왕하 18:27)이라고 협박하였다. 이 말은 식량과 식수의 공급을 원천 봉쇄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을 고사시키겠다는 재앙적인 엄포였다. 열왕기하 20장 20절은 히스기야(Hezekiah) 왕의 생애를 요약하면서, 히스기야가 예루살렘 성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터널을 뚫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유다 왕 역대지략”은 아쉽게도 현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880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한 터널에서 다음의 비문이 히스기야의 사적을 증명해 주는 듯하다. 터널공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가르쳐주는 이 비문에 따르면, 두 그룹의 인부들이 각각 터널의 양쪽 끝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서로를 향해 파 들어가다가 중간에 만나서 터널이 뚫렸음을 알 수 있다. 실로암 터널 비문(Siloam Tunnel Inscription)으로 알려진 이 비문은 두 그룹의 인부들이 중간지점에서 서로 마주친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터널이 뚫리는 [날]
이 비문은 어떻게 터널이 뚫렸는가를 기록한다.
도끼를 [인부들이 휘두르며] 서로를 향하여 공사하고 있었다.
서로 만나는 지점까지 3규빗 남았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남과 [북]으로 (뻗은) 바위 안에 공동(空洞)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터널이 뚫리던 날,
인부들이 마지막 벽을 부수자, 그들은 맞은 편의 인부들과 만났다
도끼와 도끼가 부딪쳤다
그러자 물이 샘에서 못으로 흘러 내려왔다.
1200규빗의 거리이다.
인부들의 머리 위에 바위의 높이는 100규빗이었다.
이 비문에는 히스기야나 산헤립의 이름은 명기되지 않았으나, 이 비문이 열왕기하 20장 20절에 기록된 터널 공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실로암 터널 비문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그 비문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터널 입구에서 안쪽으로 약간 들어간 안 보이는 곳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이 비문이 왕의 업적을 선전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새겨진 비문(앞으로 살펴보게 될 메사 비문처럼)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아마도 이 비문은 당시 터널 안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만 볼 수 있도록 새겨진 것일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이 비문은 비공식적으로 기록된 솔직한 역사자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가를 증거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피터 엔즈,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 48-49 페이지에서 요약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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